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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 진료 거부가 3주를 훌쩍 넘긴 가운데, 전공의 ㄱ씨가 한겨레에 전해준 내부 분위기는 살벌했다. 1970년대 고교 평준화 정책 시행 이후 일부 명문고 졸업생들이 비평준화 세대와 평준화 세대를 분리해 동창회를 따로 열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거의 반세기가 지난 2024년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기시감이 들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 매진한 의사’가 아닌 ‘반에서 20~30등 하던 의사’를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공공의대와 지역의사제를 깎아내렸던 전력 말이다.
의사집단의 이런 특권의식과 폐쇄성은 장기전으로 접어든 전공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힌트를 주는 열쇳말이다. 전국 수련병원 100곳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는 전공의 1만2천명(전체의 93%)은 지난달 20일 병원을 비운 뒤로 여태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발단은 정부의 의대 증원 규모, 2천명이었다. 일반 국민들이 보기엔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전세계 어디에도 의사 수를 늘린다고 의사가 진료를 거부하는 나라가 없기도 하지만, 응급실과 중환자실마저 아무런 말미도 주지 않고 비웠다. 정부와의 협상이나 최후통첩과 같은 과정도 생략됐다. 누군가의 생명권을 위협할 수 있는 극단적 방법을 동원하면서 환자들이나 병원에 남은 다른 직역 동료들에게 최소한의 양해를 구하는 과정도 없었다. 집단행동에 들어간 뒤에야 누리집에 ‘증원 계획 전면 백지화’를 포함한 요구안만 게시한 채, 정부 대화 요청에도 묵묵부답이다. 일단 요구안을 수용하라는 엄포다. 소통 방식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집단행동의 효능감은 젊은 의사들에게도 내면화돼 있다. 필수·응급 의료의 최전선인 상급종합병원 전체 의사의 37.8%가 전공의다. 배우는 신분인 전공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기형적 구조로 인해, 집단행동이 벌어질 때마다 병원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환자들은 볼모로 잡힌다. 정부 의료정책 추진→전공의 진료 거부→의료공백에 따른 환자 피해→정책 추진 중단이라는 악순환이 지난 20여년간 반복됐다. 도제식 교육으로 교수와 선배가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치는 폐쇄적 구조에서 의사들의 응집력은 남다르다. 제자(전공의)가 진료를 거부하더라도 스승(교수)은 말리는 대신 응원을 한다. 기명투표·블랙리스트 등 다른 생각이 나올 수 있는 통로 자체가 봉쇄되는 정황도 여럿 보인다. 2020년 의대 증원에 반발한 장기간 집단휴진에도 불이익은 없었다. 업무개시명령 불응으로 고발 당한 전공의들도, 정부를 무릎 꿇린 뒤에도 ‘정책 철회 명문화’를 고집하며 의사 국가시험을 거부한 의대생들도 모두 구제 받았다.
물론 총선 두달 전에 ‘2천명 증원’을 깜짝 발표한 정부도 마냥 박수 받을 처지는 아니다. 국정 지지율 상승을 위한 노림수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지난 1년여간 의협과 28차례나 만났다고 강변하지만, 애초 예상보다 훨씬 늘어난 증원 숫자는 최근에야 내놓지 않았나. 그럼에도 일부 의대 교수와 전문가가 제안하는 점진적 증원론(500~1천명)이 타협책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숫자가 아닌 것 같아서다.
500명 증원이었으면 집단사직이 없었을까. 의사들은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해 증원 여부를 정하자는 입장인데, 정부가 의사 수급 전망의 근거로 삼은 국책연구기관(KDI·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서울대 의대 교수들은 ‘공신력있는 해외 기관에 분석을 맡기자’는 황당한 제안까지 내놨다. 의사집단 전체가 수긍할 만한 과학적 데이터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고만 되뇌며, 고령화에 따른 의료 수요 증가나 은퇴하는 의사들을 고려하지 않은 추계를 내미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전문 분야 중에서도 의료는 유독 정보 비대칭성이 크다. 생사가 오가는 진료실의 최종 결정권자인 의사들의 독점적 권한이 의사 수를 정하는 정책 결정 과정에도 그대로 행사되길 바라는 오만함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2024.03.15, 한겨레[아침햇발], 황보연 기자